1/31/2018

[메모] 20180112 동물처럼 구를 때

다듬지 않은 메모_김지연 작가는 '관찰자로서의 작가적 태도가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으로 미들 보이스(middle voice, 중간태(中間態))에 관한 개념을 언급하였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미들 보이스는 능동태와 수동태가 가진 이분법적 행위가 아닌 반사, 역 그리고 자동적인 개념으로서의 성질을 의미한다. 각각 내가 나를 죽인다든지(행위가 반사되어 돌아오는), 키스를 한다든지(행위를 교환하는), 썩는, 나타나는, 사라지는 (행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등의 동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5분, 20분, 10분 분량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작가는 이 사운드를 기록했던 자신의 작가적 태도를 '듣는 행위'로 연결지어 말을 이어갔다. '듣는 주체'인 작가는 비를 '맞으며' 비를 녹음할 때,  워터 탱크 '밖에 서서' 탱크의 안 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녹음할 때, 낙하하는 물방울 '주위의' 온갖 노이즈를 함께 녹음할 때 스스로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메모해두었고 우리는 그녀의 기록을 함께 낭독하였다. 최근 세바스치앙 살가두와 동료들이 바다코끼리를 찍으려고 빙판 위를 천천히 구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몸짓은 인간이 아닌 무엇에 다가가기까지의 거리를 횡단하는 방법이었고, 나는 김지연 작가가 물방울에 접근하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듣는 주체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세 번 째 물방울 소리가 좋았다. 정확히는 물방울의 뒤(인간이 아닌)에서 개가 짖는(개가 나타난) 소리가 좋았다. 

*노 연, 캔 위 토크 어바웃 MAVO?(전시)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혹은 Z白호와 버터플라이 사이의 코스들(어셈블리) 중 12일 20:00~22:00에 진행된 김지연, 이강일의 토크식 컨트리뷰션을 관람하였다. 


text by 봄로야 


[서문] 불편한 고리들: 폭력의 예감



불편한 고리들: 폭력의 예감
2016.6.22-6.30
봄로야, 윤나리, 자청, Q9, 혜원 
스페이스 ALTEREGO

일러스트레이터, 미술작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인 5명의 작가가 준비한 이번 전시 ≪불편한 고리들: 폭력의 예감≫은 이들의 활동명인 ‘노뉴워크(NO NEW WORK)’의 공식적인 첫 번째 프로젝트이다. ‘시각이미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모임’을 활동 기제로 정하기에 앞서 이 프로젝트가 생기게 된 계기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둘러싼 각자의 시선을 솔직하게 교환하면서 시작되었다.

여성 폭력의 현장은 그 어떤 사건도 획일적으로 설명되거나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윤나리 작가는 2015년 3월부터 약 1년 동안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 성폭력, 강간, 살인, 추행, 사기, 협박 등의 기사를 모아 피해자의 감정을 일일이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피해자가 겪었을 외상과 내상에 오롯이 집중하여 검정과 파란색으로만 그려진 80여 장의 이미지들은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는 미디어의 왜곡에 맞선다. 

비슷한 결로 봄로야 작가는 1992년 의붓아버지로부터 12년간 성폭행을 당하고 결국 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의 사건에 집중하였다. 작가는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토대로 사건을 피해자, 언론과 여론, 경찰의 대응 등 다각도의 레이어로 나누어, 각각의 입장에서 파생된 텍스트들을 반복하여 기록한다. 기록의 끝은 피해자의 진술로 엮은 단어를 재배치하여 고통을 상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동시에 1997년에 제정된 가정폭력 방지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프린트를 배치하여 폭력이 발생한 가정이 제도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기록화되지 않은 사적 경험을 보임으로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 속 폭력을 드러내고자 한 자청 작가는 어린 시절에 겪은 기억을 퀄트 작업으로 표현하였다. 퀄트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전업주부일 때 찾았던 해방구이자 억압”의 표상이다. 페미니즘 미술 작가들이 강요된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한 퀄트를 작업 기법으로 응용하여 그 의미를 전복시켰듯,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응시하며 일상 속 폭력에 따른 무감과 피로를 해소한다.

Q9와 혜원 작가는 각각 ‘속담’과 ‘포르노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성적 욕망에 따른 폭력을 다루었다. 속담은 예로부터 여성이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언어체계이다. 여성에 관한 편견이 담긴 15,000여 개의 속담을 수집한 <세계여성속담사전>(미네케 스히퍼 저)에서 영감을 받은 Q9 작가의 작업은 남성중심사회의 이분법적 잣대로 폄하된 여성성을 초현실적인 모험으로 재구성하여 그래픽 노블로 제작하였다. 혜원 작가는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비판하는 방법으로서 ‘현대미술에서 재해석되는 포르노 이미지’를 고찰한다. 작가는 상품화된 여성을 신체 이미지를 비판하는 기존 작품들의 주제 의식은 분명 인정하나, 작품 속 해당 여성 주체의 성적 욕망은 표백되고 자본주의와 남성중심사회의 권력 구조로 인해 희생당한 피해자로만 고정되어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는 주제와 그 목적이 선할지라도 보는 이로 인해 성적 대상화된 인물의 주체성이 다시 타자화되는 수많은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오늘도 우리는 여성들이 신체적, 언어적인 폭력 앞에서 불합리함을 겪거나 심각하게는 목숨을 잃는 상황을 보고, 듣고, 경험한다. 노뉴워크는 이번 전시를 통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할 수 있는 폭력의 민낯들을 이미지로 기록하고 드러내며 전복하는 작가적 태도를 공유하고자 한다.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될 ‘폭력의 예감’을 함께 감각하고 그 불편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실천 지표를 찾는 과정이다.

text by 봄로야

[리뷰] 떠도는 불안-<오후 네 시의 생활력>


떠도는 불안
-<오후 네 시의 생활력> Review

말과활 12월호 기고


1. 근종의 자궁 없음

“이 판도 스트레스 작렬이야.” 이주노동자를 돕는 활동가의 말이다. 나는 왜 활동가는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적어도 나보다는 사회가 만든 선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어이없는 상대적 박탈감에 화가 난다. 더 이상 꿈이 될 수 없는 내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만 남아 서로의 눈을 가린다. 나는 사회에서 ‘이 선생’으로 불린다.
남의 일에 상관 말고 내 일에만 성실하라던 엄마의 가르침이 나의 입을 통해 학생들에게 옮겨 간다. "생각하지 마. 머리를 멈춰." 내 말은 학교 안에서 매일 유효한 지침이 되었다. 나 또한 생각을 멈추고 교감을 따라 교회를 나가며, 봉사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안에서 생긴 분노가 원인을 감춘 채 거리의 누군가에게 전이된다. 이게 이 선생의 판이다.
의사 선생이 ‘이 선생’의 자궁을 파내야 한단다. 자궁에 작고 큰 근종들이 생겼다고 한다. 의사는 출산을 거들먹거리며 적출을 권유했다. 실비 보험이라도 가입해서 다행이지, 아무것도 없는 애인 묵호가 문득 걱정된다. 묵호는 ‘활동가’이다. 묵호의 주변은 분노의 원인을 촛불로 비춘다. 활동가는 근종은 자궁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근종의 근본 원인이 내가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말해 준다. 분노에 이름이 생긴다. 나는 들어내지 않기로, 버리지 않기로, 그만두지 않기로 한다.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내가 되고 싶지 않고, 정치가 달라졌으면 해요.” 그렇게 내 자궁이 할 역할의 두께는 한 겹 얇아졌다.

2. 미혼과 마흔의 ㅣ와 ㅏ

오늘을 24시간으로, 한 시간으로, 일분으로 잘게 쪼개 본다. 상하기 직전의 묵은지를 버리지 않고 고등어 묵은지 찜으로 만들어 묵호를 초대해 함께 먹었다. 친구가 여행 가는 동안 아이를 낳지 못 하는 고양이 두 마리를 돌봐 주었다. 방학에는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돌봐 주기로 했다.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의 방학은 내가 서른 살에서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매번 계약 연장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다른 학교로 이주되기 전의 불안한 유예 기간.
내일은 알 수 없는 빈 구멍이다. 구멍으로 먹으면 안 될 음식들이 흘러 들어온다. 이주노동자들의 핸드폰에 슬픈 미소들이 찍힌다. 노량진 독서실에서 유령처럼 공부하는 고시생의 찐내로 채워진다. 텅 빈 첫 지하철에는 노인들과 청소부가 탄다. 고 3 담임을 맡았을 때 자퇴한 수현이의 빈자리에 다른 학생이 앉는다. 묵호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마음이 텅 빈다. 묵호는 내일이 두렵지 않을까? 묵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미혼이 아닌 나의 내일은 어떨까.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 임금에 수업 하나 더 보태기에 자리를 거절했다. 고양이와 친구가 듣더니 큭큭 웃는다. 어중간한 방학은 끝났다. 틈틈이 부모가 예상하지 못한 이런 나의 숱한 오늘을 수긍하도록, 미리 그들 곁에 내 자리도 만들었다. 두 팔꿈치와 두 다리로 플랭크! 버텨왔더니 버틸 줄 알고, 참았더니 참을 줄 알게 된, 그래서 참지 않고 얻은 오늘의 얄궂은 자리이다. 농부가 삼백 원 받고 이주노동자들이 힘들게 키운 상추를 빈 입속에 밀어 넣는다. 부모님이 직접 키워 만든 오달진 수세미로 묵호가 설거지를 했다. 적당히 깨끗하게 잘 닦인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창문 밖에 서면 건물 안이 보이고, 창문 안에 서면 건물 밖이 보인다. 구멍 같은 창문은 안, 밖을 연결해주고 새로운 공기로 채워 넣는 중요한 자리이다. 활동가는 나를 세상과 별도로 두지 말라고 했다.

3. 은근 티 나는 소리

고용허가제 폐지를 위한 서명지를 나눠주는 묵호를 보고 있자니, 주보를 나눠 주는 내가 창피하다. 그들 안에 묵호가 있고, 임용고시 학원 안에도 묵호가 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들은 오후 네 시를 넘어 노을을 뚫고 밤과 새벽이 만든 짙은 구멍에 감자탕과 소주를 붓는다. 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티를 낸다. 유보했던 내 삶의 문제들이 현수막과 피켓에 적혀 있다. 사월부터 겨울까지, 오후 네시 나의 퇴근길은 그래서 괴로웠다. 
막노동으로 나를 키운 부모에게 쌓인 죄책감을 비 오는 날 함께 잡초를 뽑으며 은근하게 녹여 낸다. 부모는 은근 기쁜 티를 낸다. 학교를 떠난 수현에게 미더운 말 못 해준 자신을 자책하며, 수현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에 은근 자주 가서 치킨을 시켜 먹는다. 함께 살기 위해 중성화 수술을 시킨 고양이 율이와 파니에게 친구는 은근히 미안함을 느낀다. 동생은 나를 야라고 불렀다. 여동생의 눈에 나는 비혼에 출산을 거부하며 가족과 거리두기가 은근 티 나는 사람으로 비치겠지. 조카를 자주 돌봐준다. 여동생이 어느새 나를 언니라 부른다.
은근 티 나는 소리들이 소란스럽다. 전경들이 바글바글, 시위대도 바글바글, 부침이 지글지글, 묵은지가 보글보글, 경운기가 탈탈탈, 고물 컴퓨터가 털털털, 지하철이 덜컹덜컹, 기차가 철컹철컹, 헤어 드라이기 윙윙, 교실 안 히터 소리 윙윙, 이주노동자의 남자 숙소 안 선풍기 윙윙, 그들의 핸드폰이 찰칵 찰칵, 반 까페에 올리기 위해 선생이 핸드폰으로 지하철을 찰칵 찰칵, 아버지가 수세미를 쁘드득 쁘드득, 이주노동자가 상추를 쁘드득 쁘드득, 병실에서 습하, 습하, 바다에서 습하, 습하. 소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답을 알려주지 않는 세상의 거대한 침묵이었다. 되새겨야 할 반성과 자부심의 소리가 엄마의 니기미, 아버지의 니기미, 청소부 아주머니의 니기미 씨발에 섞여 은근 티 내며 세상을 채운다. 무엇으로 삶이 되었던가.

4. 개구리헤엄력

나머지 근종을 성실하게 떼어냈다. 근종 때문에 자궁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모난 돌들 때문에 세상의 질감을 알게 되었다. 밀려난 게 아니라 스스로 링 밖으로 나왔다. 링 안쪽으로 떠도는 불안 덩어리들이 보인다. 두 팔과 다리를 개구리처럼 접었다, 폈다 반복해서 다시 링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개의 구멍들도 함께 보인다. 구멍으로 들어가 본다. 구멍의 바닥을 발끝으로 살살 만져 본다. 머리는 구멍 밖으로 내밀어 눈으로 구멍의 주변을 확인한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구멍을 빠져나온다. 다시 링 밖으로 나간다. 링의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한다. 링이 구멍이고 구멍이 나고 내가 링이었나 싶다. 링 안쪽으로 떠도는 불안 덩어리들이 보인다.
플랭크 자세도 잘 하지만, 개구리헤엄도 이제 잘 한다. 묵호와 함께 개구리헤엄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싶다. 습하, 습하 하고 심호흡도 잘 한다. 호흡력을 기를 수 있는 구멍도 하나 더 만들고 싶다. 숨 한 번 잘 쉬었다. 잘 쉬어서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의 심호흡이 꿈이 된다.

* 1인칭 시점으로 써 보았다. 실은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 이 만화책의 주요 등장인물인 ‘이 선생’의 이름은 50페이지에 처음 나온다. “우린 뭐 달라? 뭐야, 영진씨. 우린 사람 아냐?” 영진의 이름을 말한 이 활동가는 136페이지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촛불을 권한다. 142페이지에서는 묵호가 “이영진! 함부로 일반화 하지마.”라 말했고, 88페이지에서는 친구가 “영진아, 우리 아직 괜찮은 거야?” 라고 물었다.
* 이 만화책은 대략 19번 정도 ‘괜찮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97페이지에는 만화칸 위에 수세미 줄기가 겹쳐 그려져 있다. 편집 오류이든 의도이든 선이 있되 선을 넘고 선을 이어주는 예쁜 풍경으로 읽혔다.
* 이 만화책은 뒤에서 앞으로 읽고 라면 한 그릇 먹어도 얼핏 좋을 것 같다.

text & illustration by 봄로야

[서문] Les Flâneurs : 산책자들

Les Flâneurs : 산책자들
2013.01.24-2013.03.02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 
갤러리 스케이프 

"완벽한 산책자에게 있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물결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한가운데 거처를 마련한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다. ...집 밖에 있으면서도 모든 곳에서 자기 집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세계를 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 있는 것. ...관찰자는 모든 곳에서 익명성을 즐기는 군주이다." (보들레르,『낭만파 예술』, 파리, p.64-65「현대적 삶의 화가」) 

한 플라뇌르(Flâneur)가 거리 속 사람들 틈을 휘휘 저어 한가롭게 빠져나간다. 초점 없는 망연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광경을 관찰한다. 머릿속 관념들이 풍경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장식과 묘사는 사라지고 암시로 가득 찬 풍경만 남는다. 어느새 그는 풍경의 표면 그 안쪽을 걷기 시작한다. 산책자란 뜻을 가진 '플라뇌르'는 보들레르가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일어나는 근대화 현상을 지켜보는 자들을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세 명의 산책자,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의 작품은 현 시대의 풍경을 관찰하며 포착한 관념들을 은유적인 시각언어로 풀어놓고 있다.

첫 번째 산책자: 낯섦을 수반한 익숙한 풍경 
임소담은 여행하면서 찍은 스냅 사진, 산책하며 발견한 일상 이미지,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들을 수집한다. 수집된 풍경 이미지들은 심리적으로 연상되는 다른 풍경으로 즉흥적으로 대체되거나, 오래부터 그의 기억 속에 체화 된 장면들과 조우하며 새로운 장소성(placeness)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작품「Mother」에 보이는 텅 빈 주차장에 혼자 앉아 있는 길고양이는 작가의 무의식 저 너머에 숨어있던 표상된 존재일 수 있다.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작품 제목 또한 그림 속 풍경을 단순한 다큐멘터리적 기록이 아닌 모호한 단상이 스며든 장면으로 읽혀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보편적이고 익숙한 소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기억 속 풍경들을 쉽게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임소담이 그려낸 풍경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나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장소가 된다.

두 번째 산책자: 낙체(Falling Body)들로 가득 찬 풍경
주변의 인물, 동물 및 사건들이 재조합 된 유창창의 작품 속 가상 풍경은 모든 비극의 집합체,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다. 그는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디스토피아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성공을 상징하는 뉴욕의 지도 위에 자신의 정액을 흩뿌리고 모든 텍스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지워버린다. 또한 작가가 의도하는 파멸의 욕망을 대변하는'리틀 피플'들이 알록달록한 산야를 넘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독특하게도 작가는 인간을 중력에 얽매여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버린'낙체'들로 간주한다. 중력을 우리의 몸에 포함되어 있는 불가항력적 감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이 짊어진 생의 무게감으로 치환한 결과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천상(유토피아)에서 떨어져 이미 천하(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피조물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낙체들로 가득 찬 불안과 우울로 침잠된 디스토피아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산책자: 무와 유가 공생하는 개념화 된 풍경

식물과 각목, 비닐, 나뭇가지들로 엮어 만든 이해민선의「직립 식물」연작은 도시 속 나무와 식물들이 죽지 않게 지탱해주는 각목 지지대에서 비롯된 성찰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한때는 나무였던 것이 다른 나무를 지지하고 있는' 이 형상은 흡사 동물과 같이 느릿느릿 걸어 다닐 것만 같다. 그는 황폐화되거나 퇴색된 도시 속 대지에 흡사 동물의 형상 같은 이 직립 식물들을 '살아있게 보이도록' 두는데, 이들로 인해 문명과 인간에 의해 사회적 측면에선 죽은 대지는 쓸모와 생기를 얻는다.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이 서로 도우며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애처롭다. 작가의 성찰로 탄생된 '개념화 된 풍경'에 나타나는 이러한 패러독스는 생명체의 존속과 공존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인간이 생명을 대하는 이항대립적 태도에 질문을 던진다. 보들레르의 표현대로 많은 예술가들은 현대의 '어떤 생활'을 유유히 활보하며 탐구하는 익명의 산책자들이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면 사라져버리기 쉬운 풍경의 단편을 '또 다른 세계'로 확장시키는 면밀한 관찰자이다. 이번 전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자신의 주관적인 사유체계에 녹여내는 세 명의 산책자들이 가진 작가적 태도와 미적 감수성에 주목해보았다. 작가가 만들어 낸 정서적 공간을 좇아가다 보면, 일상적인 풍경이 나만의 심적 풍경(Psychological Scenery)과 부딪히며 생성되는 다양한 찰나들을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text by 봄로야

[서문] 사유지

사유지 The Private Land
2012.07.20-2012.08.19
에테르, 이지은, 정혜정, 마사하루 사토
갤러리 스케이프 

일상을 사유(思惟)하는 사유지(私有地) ●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박스나 이불 따위로 나만의 집을 지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장롱에 들어가기도 하고 비닐을 머리에 쓴 채 잠들기도 한다. 이는 유아기에서 그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에 가깝다. 그 어떤 방어기제 없이 완벽한 안락감을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사실상 태어난 순간부터 외부와 타인에게 노출되며 좌절된다. 작가 에테르, 이지은, 정혜정, 마사하루 사토(Masaharu Sato)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영역을 '자기만의 방'과 '그 외 세계'로 집요하게 분리시켜 그러한 욕망을 지속시켜나간다. 사적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욕구가 인간의 본능이지만 영역이 구축되는 형식이나 명분, 그 본질 및 내막의 성격은 창작자로서 모두 다르다.

에테르의「오류로의 기대감(Anticipation of an Error)」연작은 13세기의 서양 문학을 대표하는 단테가 사후 세계를 상징적으로 다룬 『신곡(La Divina Comedia)』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서른다섯 살 단테가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면, 단테와 같은 나이인 작가는 작은 방 안에 누워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망상의 사유를 시작한다. 시야에 보이는 칫솔, 면도기, 운동화 같은 사물들이 의인화되고 바닥, 옷장, 창문은 중세 시대 양식으로 변한다. 벽은 리투아니아어와 라틴어로 쓰인 해독 불가한 시각적 텍스트와 자신의 상으로 겹겹이 메워진다. 그림이 주는 시각 표현들은 앙리 르페브르가 그의 저서『현대 세계의 일상성(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에서 '일상성을 사물의 정돈, 분류, 결합에 따라 인격화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하는 지점'과 맞물린다. 반면 그 이면은 단테가 지옥과 연옥에서 겪은 일련의 감정들과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화려한 색감과 캐릭터가 풍기는 귀여움, 어른이 미처 되지 못한 소년의 미묘한 눈빛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이중적인 태도를 표출해내는 시작점이자 유일한 공간이 그의 작업실이자 집이 된다.

이지은은 주변에서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장난감을 혼성, 변종, 결합, 해체시켜 하이브리드 장난감 군대를 만든다. 이 군대의 최종 목표는 지구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지휘와 통제 하에 움직이는 이 부하들이 정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속에서 활동하는 히틀러를 닮은 다이버틀러, 빗으로 정전기를 일으켜 만들어진 에너지로 머리를 가격할 수 있는 주걱, 엉덩이에서 팝콘을 쏟아내는 토끼 등이 다소 엉뚱하고 귀엽게만 보인다. 작가는 장난감의 이러한 특성을 작전으로 삼아 강박적으로 반복 드로잉하여 이들의 기능을 전략적으로 노출시킨다. 벽 틈, 의자 밑, 테이블 모서리와 같은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이들을 손가락으로 집어 무심코 주머니에 넣는 순간 인간을 향한 공격은 시작된다. 세계가 사라질 때 자신 역시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시선은 잔뜩 날이 서있다. 동시에 작고 만만해 보이는 존재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천진난만하고 여린 동심이 느껴진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어떤 정복을 꿈꾼다.

보석갈귀어, 턱장어, 눈깔주머니, 이두꿀꿀 멍게라는 이름을 가진 괴이한 생명체들이 사는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소녀. 소녀는 한 명이지만 여러 명이 되어 구석구석 궁금한 곳 어디든 볼 수 있는 분신술을 겸비하고 있다. 작가 정혜정은 그 소녀이자 바다 세계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스쿠버 다이빙을 8년간 지속한 실제 경험은 물의 깊고 어두우며 고요한 성질을 응축해내고, 그 속에 사는 다양한 바다 생물들은 초현실적인 심리와 만나 인체와 결합하여 모호한 성별을 띤 존재들로 재 가공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과「섬」외에 인도, 모로코에서 모은 수집물로 만든「WWW(World Wide Wander)」프로젝트, 그리고 제네바를 다녀온 후 현재 진행 중인「Rainbow 7 brothers」작업에서도 보이듯, 작가는 낯선 장소의 공간을 자신만의 장소성(Placeness)으로 실재화시킨다. 대부분의 작업들은 마치 자신이 이 세계를 발견한 매개자인 척 카메라의 시선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구사된다. 혹은 가상의 인물이 그 세계를 관찰, 기록하거나 실재 인물들과 혼재돼 있다. 이는 환상을 실재로 만들기 위한 방법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실재가 경험 없는 '단순한' 상상에 잠식당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객관적인 의지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작가 마사하루 사토의 애니메이션「Calling」은 세밀하게 묘사 된12개의 장소, 그리고 그 장소에 놓인 12개의 전화기가 끊임없이 전화벨을 울리며 전후 구분 없이 루핑되는 작업이다. 얼핏 우리의 일상생활과 별 다를 바 없는 장소로 보이지만 전화를 받는 이가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 의자, 침대, 도로, 공원임을 곧 알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풍경들을 "빈 세계"라고 표현하는 데, 여기서 전화기는 이러한 빈 세계를 상징하는 매질이 된다. 스쳐가는 풍경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실재 너머의 극실재(Hyper-Reality)를 구현하는 그의 작업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개념화한 시뮬라크르적 환상을 연상시킨다. 비현실적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 원래의 현실이 소멸되어버리고 실재라고 믿었던 일상과 일상적 오브제들은 텅 빈 상태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Calling」에서 전화기가 그 세계를 상징하는 오브제라면 디지털 페인팅「Daylight」에서는 풀숲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Reading」에서는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 노트가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에 모인 네 작가는 공통적으로 동시대적이며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이들의 관조적 태도는 히키코모리나 아웃사이더, 염세주의자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상 거리두기를 위해 쌓은 벽은 자신의 내적 욕구를 투영할 수 있는 바깥이 비춰지는 영화 스크린과 같다. 반투명의 거대한 스크린 위에 자신들이 구조화한 일상을 오버랩 하여 타인들에게 보이게 하고픈 욕망은 유아기적 쾌락과 유희를 동반한 소년, 소녀의 에고에 가깝다. 이러한 은밀한 놀이 행위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어린 아이 같은 고집으로 시대를 사유하고자 하는 작가적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도 작용된다. 다시 말해 주류 사회, 주류 미술에서 요구하는 시스템에 발맞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립 근거를 마련하고 '사회적 죽음'에 쉽게 희생되지 않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미스터리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유지에 초대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이들을 보호하고 응원하게 된다. 자칫 잘못 손대면 박스로 만든 집이 부숴질까 걱정하며, 이불 속 공간이 헝클어질까 두려워하며 살금살금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그들이 치밀하게 조적(朝敵)해 만든 또 하나의 세계,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자 벽돌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내는 작업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text by 봄로야 

[서문] 태양의 반대편을 쫓는 남자

태양의 반대편을 쫓는 남자
-작가 김형에 관한 에세이
2012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제6기 입주작가 공동워크숍 기고글

카메라를 들고 태양의 반대편을 쫓는 남자가 있다. 그는 어둠 한 복판에 카메라에 담을 특정 인물을 감춰둔다. 명도차가 사라져 평평해진 풍경에 놓인 인물은 오로지 작가가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섬광에서만 그 형상을 드러낸다. 동시에 인물이 들고 있는 거울은 섬광을 반사해내며 번쩍인다. 인물들이 취하는 제스처는 대부분 경직되고 무표정하다. 그로 인해 형성되는 긴장감은 나머지의 어두운 공간까지도 더욱 낯설고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낮이 찾아오지 않는 밤이고 그늘이며 서늘함이다.  

김 형 작가는 경험에서 비롯된 지극히 개인적인 고독감을 주변 인물에 투영시켜 재맥락화 해왔다. 최근 그는 <심리적 관계>(2011)와 <가족사진>(2012) 연작에서, 전작이 가진 기존의 주제는 고수하되 암흑 속 인물을 포착하는 촬영 방식으로 그 프레이밍을 달리한다. <심리적 관계>는 작가가 독일의 쾰른에 머무르며 만난 사람들로,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고립감이 극대화될 무렵 최초로 소통하게 된 이들이다. 알고 보니 그들 역시 폴란드에서 건너온 이방인들이었다. 작가는 온기 없는 어둠을 뚫고 우두커니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에게서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거울을 이용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들은 거울을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비추어 섬광을 반사시키거나, 자기 얼굴의 여러 측면을 보이게 비춘다. 그런데 이 연출 구도는 자신을 비추곤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다. 전자는 섬광으로 인해 카메라를 든 작가 자신이 거울에 비춰지지 않고, 후자는 그들의 시선을 카메라에 고정시켜버림으로서 거울 속 자신을 볼 수 없게 된다. 보이지 않는 거울이라는 모순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는 작가와 그들의 자아를 상실케 하고 마치 실체 없는 유령처럼 보이게 만든다. 결국 작가와 그들 사이에 성립된 어떤 ‘심리적 관계’는 유추할 수 없이 멜랑콜리아의 서늘함으로 한없이 침잠한다. 

부모님을 촬영한 <가족사진> 역시 불안과 슬픔을 가득 내포하고 있다. 텁텁한 무늬가 베어 나오는 오래된 자개농 앞에서 눈을 가린 채 거울을 들고 있거나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아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아버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투명한 아크릴판을 들고 있는 어머니의 상은 오롯이 작가-아들의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다. 흑백사진이 주는 균일한 건조함은 죽은 자의 초상을 상기시킨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나를 감싸는 불안감과 죽음의 느낌은 항상 가족 간의 조용한 침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가슴속의 말들을 끝내 털어놓지 못하고 낯선 산속에서 가족의 물품들을 데려다 기록을 하며 애도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라고 말한다. 

아직 살아있는 가족을 애도하려는 이러한 역설적 행위는 <심리적 관계>에서 묻어나는 멜랑콜리아에 비해 다소 자기 내부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시 말해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공포 자체를 표현하기보다는 그 부재를 극복하려는 감정적 표출이다. 유일하게 인물이 없는 마른 고목 앞에 놓인 녹슨 철제 침대는 상실을 마주하려 애쓰는 작가적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또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피사체의 희미한 미소, 만개한 흰 꽃, 터지고 있는 폭죽과 같은 요소들은 어둠과 상징적으로 대치되며 미미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지금껏 작가는 어둠 속 피사체를 은밀하게 응시하며 타자를 향한 욕망을 소극적으로 보여주고, 거울과 같은 사물들을 통해 자신과 타자와의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를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던 그에게 드디어 아침을 예고하는 여명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일까. 

이는 현재 진행 중인 작품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다>(2012)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최초로 그는 이 작업에서 스스로를 자신의 애인과 함께 피사체로서 담아냈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경험이 주는 사진언어는 주변 인물에 전이시켰던 멜랑콜리아가 작가 본연의 것이었음을 직시하게 만든다. 

이토록 작가를 둘러싼 버석거리는 심연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는 어둠을 쫓아 타자를 감추고 드러내는 반복을 거쳐 마침내 자신을 솔직하게 표상하는 과정을 통해, 암흑 속 불안과 우울감에 점차 익숙해진 듯하다. 어둠에서 시작하여 어둠으로 끝난다. 가끔 가느다란 빛줄기가 단발성으로 그와 그의 주변을 비춘다. 언제 섬광이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찰나를 집요하게 부여잡는다. 그렇게 작가는 태양의 반대편으로 완전히 잠식하기로 선택한다.

text by 봄로야


[기고] 잉여에 대한 단상


잉여에 대한 단상
월간 페이퍼 매거진 2012.5월호 기고 
ⓒ 월간 페이퍼, 봄로야

밥, 케익, 비스켓과 스파게티가 넘친다. 커피와 와인을 가득 담는다. 먹고 남긴다. 개미들이 와서 먹는다. 바나나 껍질을 비둘기들이 콕콕 쪼고 있다. 도시에 사는 비둘기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바퀴를 달고 쉼없이 달린다. 집이 있고, 없고 직업이 있고 없고, 아이가 있고 없고와는 상관없이 지구상에 인간은 증식할 것이다. 나무가 크게 자란다. 잘려 A4용지가 되거나 휴지가 되거나 신문 따위가 된다. 나이테가 드러난 나무 기둥 속 뿌리는 소리없이 흙 속에서 계속 자라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보는 남겨진 사람이 있다. 그 남겨진 사람을 누군가가 사랑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현상을 한 사람이 은밀하게 지켜본다. 바나나 껍질을 캔버스에 그린다. 누군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 그림은 평생 방에서 뒹굴 거릴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껍데기가 쓰레기봉투에 담긴다. 누군가 그것을 가져가고 일부는 태워지고 또 일부는 땅 속에 묻힌다. 쓰레기봉투는 넘쳐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불필요한가. 최초의 채워짐과 최후의 비움을 누가 목격할 수나 있을까. 우주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잉여물이다. 처절하게 평화롭지 않은가.  

text & illustration by 봄로야 

[서문] 달의 뒷면

달의 뒷면 The Far Side of the Moon
2011.11.24-2012.01.08
권순영, 박용식, 임소담, 홍범

갤러리 스케이프 


우리 눈에 보이는 익숙한 달의 표면은 오로지 앞면이다. 그 이유는 지구를 공전하는 달이 동시에 자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측된 달의 뒷면은 우주 속 크고 작은 천체의 파편에 부딪혀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낯설음으로 가득하다. 본 전시『달의 뒷면(The Far Side of the Moon)』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리얼리티의 모순적인 지점을 각기 다르게 접근하여 표현한 박용식, 임소담, 홍범, 권순영의 작품을 소개한다. 네 명의 작가는 실재하는 삶과 경험의 표상들을 우주의 저 이면으로 보낸다. 그리곤 사실상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움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그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일식으로 감추어진 달이 희뿌옇게 드러난 권순영의 작업은 반짝거리는 별, 만화 캐릭터, 둥그렇고 투명해 보이는 형상들로 가득 차있어 거리를 두고 보면 달콤하고 순수한 크리스마스와 같은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림 속 모든 캐릭터들은 훼손되어 파편화된 장면을 연출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역설적인 그로테스크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판타지는 작가의 아픈 개인적 기억, 폭력과 공포를 다룬 뉴스 등에서부터 비롯되어 무의식에 가까운 자동기술법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므로 관람자는 작품 속 감추어진 리얼리티의 실체를 확인할 길 없이 보편적인 우울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작가의 기억 속 서사는 반은 웃고 반은 우는 슬픈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환상에 감추어져 또 다른 이야기로 전이된다.

홍범의 작업 역시 관람자의 무의식적 교감이 작가 개인의 경험에 이입되면서 몽환적인 공간으로 확장된다. 작품 「Unknown Circulation」은 점, 선, 면을 세밀하게 이용하여 얼기설기 짜인 파이프에 이름 모를 나무, 풀, 작은 생물체가 유기적으로 구조화 된 드로잉이다. 작가는 이 드로잉들을 마치 퍼즐처럼 조각조각 연결한다. 몽환의 속뜻인 '세상 일체(一切) 사물의 덧없음'을 표현한 듯 관람객은 작가 기억의 사물들을 구체적으로 유추하긴 힘들다. 영상 스크리닝을 통해 구리관에 오브제들의 잔상을 쌍방향 거울에 겹겹이 투사시키는 미디어 설치 작업 「Hide & Seek」 역시 몽환적인 아우라를 발하며 관람객의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권순영과 홍범의 작업이 잃어버렸던 유아기의 기억에까지 닿아 무의식적 불안의 이마고(imago)를 만들어낸다면, 임소담과 박용식은 자연, 일상, 동물 등에 자아를 투과시켜 관람자에게 또 다른 '달의 뒷면'을 보여준다. 임소담은 실재하는 풍경의 단편들만을 붙잡아 건조한 색채로 이들을 탈색화(脫色化) 시키는데, 그러한 작업 과정에서 연상이나 상상되는 감성적인 풍경 이미지는 부정된다. 스쳐지나가는 일상을 스냅 사진으로 담아 다시 드로잉하는 이 과정은 단순한 산책자가 아닌, 자신을 둘러싼 풍경과 갖가지 현상들을 숨죽여 관조하는 관찰자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관람자는 그림 속 거친 붓질 속에 보이지 않으나 실존하는 리얼리티의 풍경을 발견하며 동시에 자신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작가가 숨겨놓은 현실의 좌표 어딘가에 놓인 채 스스로를 관찰하게 된다.

그에 비해 눈이 가려진 개와 공중에 매달린 푸릇하고 붉은 심장이 의미심장함을 자아내는 박용식의 신작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는 볼 수 없는 리얼리티의 모순점을 보다 촉각적으로 제시한다. 동물모형에 자신의 서사를 담아 작업해온 작가의 말에 의하면 심장은 개, 자신의 것이다. 끊임없이 그 심장을 향해 응시를 시도하지만 개의 눈은 가려진 천의 두께를 뚫지 못한다. 자신의 심장을 볼 수 없는 주체와 밖으로 꺼내진 그것을 볼 수 있는 타자, 그러나 그 타자 역시 자신의 심장을 볼 수 없는 주체라는 역설적 관계의 연쇄작용은 그의 작업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획전 「달의 뒷면」은 네 명의 작가가 제시하는 기억과 환상이 뒤섞여 모호한 틈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어 누군가를 기다린다. 관람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리얼리티가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판타지와 맞닥뜨리며 낯선 혼란과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달의 뒷면'에서 조우한 모든 기억들은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편화된 이미지로 부유하는 일종의 현상으로만 남을 뿐이다. 

text by 봄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