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018

[리뷰] 떠도는 불안-<오후 네 시의 생활력>


떠도는 불안
-<오후 네 시의 생활력> Review

말과활 12월호 기고


1. 근종의 자궁 없음

“이 판도 스트레스 작렬이야.” 이주노동자를 돕는 활동가의 말이다. 나는 왜 활동가는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적어도 나보다는 사회가 만든 선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어이없는 상대적 박탈감에 화가 난다. 더 이상 꿈이 될 수 없는 내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만 남아 서로의 눈을 가린다. 나는 사회에서 ‘이 선생’으로 불린다.
남의 일에 상관 말고 내 일에만 성실하라던 엄마의 가르침이 나의 입을 통해 학생들에게 옮겨 간다. "생각하지 마. 머리를 멈춰." 내 말은 학교 안에서 매일 유효한 지침이 되었다. 나 또한 생각을 멈추고 교감을 따라 교회를 나가며, 봉사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안에서 생긴 분노가 원인을 감춘 채 거리의 누군가에게 전이된다. 이게 이 선생의 판이다.
의사 선생이 ‘이 선생’의 자궁을 파내야 한단다. 자궁에 작고 큰 근종들이 생겼다고 한다. 의사는 출산을 거들먹거리며 적출을 권유했다. 실비 보험이라도 가입해서 다행이지, 아무것도 없는 애인 묵호가 문득 걱정된다. 묵호는 ‘활동가’이다. 묵호의 주변은 분노의 원인을 촛불로 비춘다. 활동가는 근종은 자궁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근종의 근본 원인이 내가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말해 준다. 분노에 이름이 생긴다. 나는 들어내지 않기로, 버리지 않기로, 그만두지 않기로 한다.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내가 되고 싶지 않고, 정치가 달라졌으면 해요.” 그렇게 내 자궁이 할 역할의 두께는 한 겹 얇아졌다.

2. 미혼과 마흔의 ㅣ와 ㅏ

오늘을 24시간으로, 한 시간으로, 일분으로 잘게 쪼개 본다. 상하기 직전의 묵은지를 버리지 않고 고등어 묵은지 찜으로 만들어 묵호를 초대해 함께 먹었다. 친구가 여행 가는 동안 아이를 낳지 못 하는 고양이 두 마리를 돌봐 주었다. 방학에는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돌봐 주기로 했다.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의 방학은 내가 서른 살에서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매번 계약 연장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다른 학교로 이주되기 전의 불안한 유예 기간.
내일은 알 수 없는 빈 구멍이다. 구멍으로 먹으면 안 될 음식들이 흘러 들어온다. 이주노동자들의 핸드폰에 슬픈 미소들이 찍힌다. 노량진 독서실에서 유령처럼 공부하는 고시생의 찐내로 채워진다. 텅 빈 첫 지하철에는 노인들과 청소부가 탄다. 고 3 담임을 맡았을 때 자퇴한 수현이의 빈자리에 다른 학생이 앉는다. 묵호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마음이 텅 빈다. 묵호는 내일이 두렵지 않을까? 묵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미혼이 아닌 나의 내일은 어떨까.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 임금에 수업 하나 더 보태기에 자리를 거절했다. 고양이와 친구가 듣더니 큭큭 웃는다. 어중간한 방학은 끝났다. 틈틈이 부모가 예상하지 못한 이런 나의 숱한 오늘을 수긍하도록, 미리 그들 곁에 내 자리도 만들었다. 두 팔꿈치와 두 다리로 플랭크! 버텨왔더니 버틸 줄 알고, 참았더니 참을 줄 알게 된, 그래서 참지 않고 얻은 오늘의 얄궂은 자리이다. 농부가 삼백 원 받고 이주노동자들이 힘들게 키운 상추를 빈 입속에 밀어 넣는다. 부모님이 직접 키워 만든 오달진 수세미로 묵호가 설거지를 했다. 적당히 깨끗하게 잘 닦인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창문 밖에 서면 건물 안이 보이고, 창문 안에 서면 건물 밖이 보인다. 구멍 같은 창문은 안, 밖을 연결해주고 새로운 공기로 채워 넣는 중요한 자리이다. 활동가는 나를 세상과 별도로 두지 말라고 했다.

3. 은근 티 나는 소리

고용허가제 폐지를 위한 서명지를 나눠주는 묵호를 보고 있자니, 주보를 나눠 주는 내가 창피하다. 그들 안에 묵호가 있고, 임용고시 학원 안에도 묵호가 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들은 오후 네 시를 넘어 노을을 뚫고 밤과 새벽이 만든 짙은 구멍에 감자탕과 소주를 붓는다. 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티를 낸다. 유보했던 내 삶의 문제들이 현수막과 피켓에 적혀 있다. 사월부터 겨울까지, 오후 네시 나의 퇴근길은 그래서 괴로웠다. 
막노동으로 나를 키운 부모에게 쌓인 죄책감을 비 오는 날 함께 잡초를 뽑으며 은근하게 녹여 낸다. 부모는 은근 기쁜 티를 낸다. 학교를 떠난 수현에게 미더운 말 못 해준 자신을 자책하며, 수현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에 은근 자주 가서 치킨을 시켜 먹는다. 함께 살기 위해 중성화 수술을 시킨 고양이 율이와 파니에게 친구는 은근히 미안함을 느낀다. 동생은 나를 야라고 불렀다. 여동생의 눈에 나는 비혼에 출산을 거부하며 가족과 거리두기가 은근 티 나는 사람으로 비치겠지. 조카를 자주 돌봐준다. 여동생이 어느새 나를 언니라 부른다.
은근 티 나는 소리들이 소란스럽다. 전경들이 바글바글, 시위대도 바글바글, 부침이 지글지글, 묵은지가 보글보글, 경운기가 탈탈탈, 고물 컴퓨터가 털털털, 지하철이 덜컹덜컹, 기차가 철컹철컹, 헤어 드라이기 윙윙, 교실 안 히터 소리 윙윙, 이주노동자의 남자 숙소 안 선풍기 윙윙, 그들의 핸드폰이 찰칵 찰칵, 반 까페에 올리기 위해 선생이 핸드폰으로 지하철을 찰칵 찰칵, 아버지가 수세미를 쁘드득 쁘드득, 이주노동자가 상추를 쁘드득 쁘드득, 병실에서 습하, 습하, 바다에서 습하, 습하. 소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답을 알려주지 않는 세상의 거대한 침묵이었다. 되새겨야 할 반성과 자부심의 소리가 엄마의 니기미, 아버지의 니기미, 청소부 아주머니의 니기미 씨발에 섞여 은근 티 내며 세상을 채운다. 무엇으로 삶이 되었던가.

4. 개구리헤엄력

나머지 근종을 성실하게 떼어냈다. 근종 때문에 자궁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모난 돌들 때문에 세상의 질감을 알게 되었다. 밀려난 게 아니라 스스로 링 밖으로 나왔다. 링 안쪽으로 떠도는 불안 덩어리들이 보인다. 두 팔과 다리를 개구리처럼 접었다, 폈다 반복해서 다시 링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개의 구멍들도 함께 보인다. 구멍으로 들어가 본다. 구멍의 바닥을 발끝으로 살살 만져 본다. 머리는 구멍 밖으로 내밀어 눈으로 구멍의 주변을 확인한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구멍을 빠져나온다. 다시 링 밖으로 나간다. 링의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한다. 링이 구멍이고 구멍이 나고 내가 링이었나 싶다. 링 안쪽으로 떠도는 불안 덩어리들이 보인다.
플랭크 자세도 잘 하지만, 개구리헤엄도 이제 잘 한다. 묵호와 함께 개구리헤엄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싶다. 습하, 습하 하고 심호흡도 잘 한다. 호흡력을 기를 수 있는 구멍도 하나 더 만들고 싶다. 숨 한 번 잘 쉬었다. 잘 쉬어서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의 심호흡이 꿈이 된다.

* 1인칭 시점으로 써 보았다. 실은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 이 만화책의 주요 등장인물인 ‘이 선생’의 이름은 50페이지에 처음 나온다. “우린 뭐 달라? 뭐야, 영진씨. 우린 사람 아냐?” 영진의 이름을 말한 이 활동가는 136페이지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촛불을 권한다. 142페이지에서는 묵호가 “이영진! 함부로 일반화 하지마.”라 말했고, 88페이지에서는 친구가 “영진아, 우리 아직 괜찮은 거야?” 라고 물었다.
* 이 만화책은 대략 19번 정도 ‘괜찮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97페이지에는 만화칸 위에 수세미 줄기가 겹쳐 그려져 있다. 편집 오류이든 의도이든 선이 있되 선을 넘고 선을 이어주는 예쁜 풍경으로 읽혔다.
* 이 만화책은 뒤에서 앞으로 읽고 라면 한 그릇 먹어도 얼핏 좋을 것 같다.

text & illustration by 봄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