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2018

[포럼]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hyphen)


2018 프린지 페스티벌 올모스트프린지: / 예술가에게 필요한 공간은 어디인가? /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hyphen)

. 봄로야 (시각 예술 작가, 기획자)

* 이 글은 기획팀과의 사전 논의를 거쳐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공간사용법을 다룬다. 주로 시각 예술 분야와 관련하여 회고한 에세이에 가깝다. 시점이 있다. 각주를 본문처럼 활용하였다. 각주 1, 6, 8번은 직접 인용, 나머지는 글에 따른 보조글로 덧붙였다.

약속된 미래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곳마다 폐허가 생겨났지만,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미래를 소환하려는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다.
미술이 폐허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1]

1.

2016년 소위 신생공간으로 인식되는 탈영역 우정국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은 이유는 우체국이었던 과거의 시간이 전시장에 흔적처럼 묻어있고, 이곳에서 진행한 전시 및 프로그램의 장르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개인전의 주제는 작업을 지속하는데 느낀 불안과 두려움을 중심에서 변두리로 생활의 반경을 옮기며 맞닥뜨린 개발도시의 풍경과 연결한 프로젝트였다. 음악, 영상, 목소리, 글 등 장르별 종사자와의 협업 방식은 탈영역 우정국의 공간적 특성과 상당 부분 어울렸다고 생각한다.[2] 이 같은 나와 공간의 상생 구조를 이번 포럼과 관련하여 신생공간의 특성과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한 예로, 2009년 보안여관[3]에서 열린 전시 <휘경, 사라지는 풍경>(2009)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거주하거나 작업을 하는 작가 6인이 재개발로 철거되는 도시 광경을 사유했다. 전시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주제와 보안여관의 역사, 건물의 골조가 거칠게 드러난 공간의 분위기와 조화로웠을 것 같다. 내가 전시 장소를 탈영역 우정국으로 선택한 이유와 다소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만일 탈영역 우정국과 보안 여관 중 한 곳에서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면(행복한 가정) 나는 어느 곳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탈영역 우정국을 염두했을 것이다. 거주지역에 생뚱맞게 위치한 이질감과 어느 정도 구축된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 분위기가 자칫 도시성으로 치우치기 쉬운 작업 주제를 중화시켜주고, 작업에 담긴 사적인 작가의 생활과 고민이 그곳을 드나드는 작가나 관람객의 층위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공간 운영자와의 교류가 더 쉽고 익숙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2010년도 이래로 생성과 종료를 반복하고 있는 신생공간[4]은 주류와 비주류, 권력의 재분배 기준으로 판단될 여지가 큰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생긴 대안공간과는 다른 양상으로 해석된다.[5] 많은 신생공간은 그저 전체 미술계에 연결link만 되어있는 채로 작가와 전시, 공연 등이 지나가는 통로를 구성한다.[6] 예술가로서의 작업 환경과 활동 반경을 전시 공간에 포함하여 맥락화하는 방식을 목격하며, 우선 나의 관람 태도를 바꿔야 했다. 예약해야만 방문할 수 있거나 창문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단지 전시를 보러 갔을 뿐인데 누군가의 작업실에 침입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이 될 때가 있지만 그대로 투과되어버릴 때도 있었다. ‘라는 존재가(예술가이든, 관람객이든) 굳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뜻이다.

이 낯선 기분은 분주히 돌아가는 주류 담론의 판을 위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장력을 확인하고 관계를 모색하는 주체적인 예술가들의 에너지 자체로 느껴졌다.[7] 폐허, 유령 등으로 표현되지만 문자 집합 내 특수 기호같이 내용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거나 잇고 엮는 역할로 기능한다. 현재 시점에서 이들 자신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8] 이 지점이 신생 공간의 모든 존속 이유는 아니지만 또 하나의 낯선 경험을 풀어 보자면, 당시 개인전 오프닝에 온 관람객 중 상당수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러했듯이 자신이 만든 타임라인을 따라 탈영역 우정국의 공간을 통과하는 자로 짐작해본다.   

2.

     2014년 개인전 <사라의 짐>은 망원동에 위치한 Alter Ego[9]에서 선보였다. 간판이 없고 은은한 조명이 잘 어울리는 회색 조의 벽, 공간 특유의 시그니처 향이 가득한 곳이었다. 공간 대표의 감각과 취향이 예민하게 녹아있어 작품과 공간의 균형감이 중요했다. 공간 안쪽의 서재 스타일의 응접실은 사적인 관계자들과의 소모임이나 스터디로 북적였고 때때로 낯선 관람객과의 대화로 기분 좋은 균열이 일어나곤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동시에 책을 제작하는데 힘을 쏟았고, 고민 끝에 독립출판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NEMO에서 개최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였다.[10]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문화예술 현장이었다. 아트 페어나 북 페어와는 다른 분위기의 폐쇄성이 있었다.[11] 각자의 자리에 놓인 책이 한 권, 한 권 주인을 찾아가고 참여자 모두의 박수가 쏟아지는 순간은 참 근사한 따로 또 같이의 경험이었다. 당시 나는 책 <사라의 짐>을 읽을 독자 범위를 가늠하지 못했고, 책을 판매할 공간 파악도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판매량은 극도로 적었다. 오히려 얼마나 내가 기존의 갤러리나 아트 페어의 소비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음 해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다른 태도로 참여했다. 내 자리에 스쳐 가는 모든 이들에게 설명과 소개를 반복했고 짧은 찰나지만 대화를 나눴다. 미술관이 아트북/독립출판물 페어의 장소가 될 때 공간의 기류는 상당히 달라진다.[12] 전시와 판매의 성격을 이용하여 벽에 작은 원화 조각을 붙여 책을 구매하는 분에게 하나씩 떼어 선물했다. 실시간으로 SNS 채널에 현장의 분위기와 나의 이벤트를 게재했고, 다른 작가의 책도 소개했다. 판매 성과는 만족스러웠다. 행사가 끝날 때 또 박수가 터졌다. Alter Ego와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공간은 반쯤 열린 문과 같다. 공간의 긴장성은 집중과 선택의 즐거움을 준다.

3.

2009년 보안여관에서 열린 재개발 도시의 현장은 2016년 탈영역 우정국에서 내가 바라본 개발 도시의 풍경과 만났다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접근 같지만, 과거의 연결은 어떤 공간에서 펼쳐질 누군가의 또 다른 도시 풍경과 이어지기 위한 미래의 치열함을 동반한다. 또렷한 고집이 만들어낸 공간의 냄새는 기억을 오래 머무르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또 다른 어느 곳에서 나타난다.[13] 새로운 반복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만 되돌리기의 의미보다 조금씩 바꾸어 새로 고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공간이 행위를 연결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공간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공간에서 무엇을 하면 공간과 나 사이에 이력과 인연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 당연함을 때로 잊는다. 여러 오차와 실수를 거듭하며 느낀 점은 내가 적극적으로 공간-물리적으로 닫힌 곳이 아닌 넓은 범위의 장소성을 포함한-감각할수록 양질의 하이픈이 생긴다는 것이다.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내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반드시 동일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실행 이후 각자의 방향이 중요하다.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으로서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나 역시 공간을 위한 하이픈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말 같지만, 위의 사례처럼 공간에 따른 낯선 경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좋은 점, 배울 점으로 체화하고 내가 없는 그리고 없을 공간의 시간을 지켜보는 자세는 이후의 나에게 용기를 준다.[14]

+ 그저 나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공간도 필요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하다.[15] 상수동에 위치한 카페 커피발전소에서 이 원고의 삼 분의 일을 완성했다.





[1]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42
[2] 2012년을 전후하여 반지하, 시청각, 커먼센터 등의 새로운 공간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그 이전에 오픈한 몇몇 갤러리들이 있지만, 이러한 공간들이 주로 언급되는 것은 기존의 방식들과 어떤 차별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다. 우선 공간의 주체가 기획자, 작가, 디자이너 등으로 복합적이다 보니 운영 방식이 미술계 내부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다른 표현으로, 온전히 기존 미술계의 시선으로만 공간들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전시와 프로젝트 등의 내용성보다는 다각화의 모색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듯 하다. 대안-공간인가, 바이홍,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162
[3] 1942년부터 2004년까지 실제 여관이었고 2007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개관하였다.
[4] 신생공간의 약진은 중심과 주변의 위치감각을 만들던 여러 가치에 위협을 가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가 중심인지도 잊어버리게 혹은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도록 이끄는 장치로 작동한다. 단순히 말해서, 신생공간의 활동들은 매우 많다. 서울의 인스턴트 던전들, 강정석,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93
[5] 1세대 대안공간 이후 2~3세대와 같은 특정 세대를 나누는 일이 주류에 가까운가 / 아닌가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후 세대들의 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제도화된대안공간의 권력 관계 아래서 어떻게 재영토화하느냐, 하는 이중고이기도 하다. 꽤나 많은 신생공간들이 기존 대안공간의 활동을 반영/확장하다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대안-공간인가, 바이홍,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150
[6] 서울의 인스턴트 던전들, 강정석,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81
[7] 공간들의 전시를 접할 기회가 기존 미술 잡지나 온라인 아카이브 채널이 아닌 순전히 내가 엮은 SNS 타임라인으로 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8] 그럼에도 이 미술가들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이들 자신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창적 개인이라는 미술가의 신화와 싸우기 전에, 개인이 판단과 행위의 최소 단위로서-이를 테면 미술가로서-과연 어떻게 존속하고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173
[9] 현대 미술 애호가이자 콜렉터가 만든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콜렉터의 취향과 기호에 따른 기획전이 주로 열린다.
[10] 전시장에서 책을 보는 사람과 독립출판서점에서 책을 보는 사람은 다르다.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장에서의 책은 도록의 기능이 붙어 전시를 보조한다.
[11] 나는 독립출판이 조금 더 들썩이는 판이 되려면 폐쇄적인 채로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류는 제작자끼리의 것이 아니라 다른 신(scene)이나 기성의 출판과의 교류를 말한다. 흔히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는 유명 작가나 미술가가 50부 한정본을 발간하거나, 독립출판물이 해외에 번역돼 소개되거나, 이 씬의 작가가 대형 출판사와 작업을 하는 등의 일 말이다이로 인터뷰, "내겐 너무 소중한 '독립출판', "『아트인컬처』, 2014.12월호
[12] 인 더 페이퍼 갤러리(1), 플래툰 쿤스트할레(2,3), 무대륙(4,5), NEMO(6) 등으로 이동해왔다. 섭외가 가능한 곳 중 참가팀을 수용할 수 있으면서 UE의 성격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주로 찾았다. 상시적으로 페어를 여는 곳도 배제했다. 우리가 사용하면서 그 공간의 본래 성격과 다른 장면을 연출해 내는 걸 지향한다. 이로 인터뷰, "내겐 너무 소중한 '독립출판', "『아트인컬처』, 2014.12월호
[13] 기억의 부재속에서, 폐허는 응당 읽을 수 없기에 누구도 크게 괴롭히지 않는 아련한 공허로, 그저 어디서 본 것 같은 또 하나의 권태로운 스타일로 무기력하게 재생산된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79
[14] 문화생산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 중 하나는 공공의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연대하고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이며 쟁점, 사람, 맥락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정이라는 것은 일을 시작하기 위한 기반인 동시에 생산의 차원을 의미한다. 바라보기에는 너무 가까운, 우정에 관한 소고-요한 프레데릭 하틀과의 대화, 셀린 콘도렐리, 『스스로 조직하기』, P. 81
[15] 마구잡이식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지는 것들에 맞서 일상의 반경을 가꾸고 지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3/30/2018

[기고] 답 없는 공간 : 근사한 악몽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Z-After collective magazine Vol.2 (2018)

단어와 문장에 멋을 부리면 안 될 것 같다.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은유나 수식어구를 생각할 여유따위는 없다. 말더듬이가 되어버렸다. , , , 그러니까, , 저는, , , , 아무것도 모, 모르겠어요. 나는 간신히 그에게 내 상황을 알렸다.


얼마나 미쳤는지 계속 돌고 있어. 보이는 모든 것위에 반투명 막이 덮이고, 보일듯 말듯 나를 유혹하지. 막 위에는 공사중 표지가 세워졌어. 표지는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 빨강, 초록, 노랑, 하얀 빛이 번쩍번쩍 거리거나 바람에 방향에 따라 바람개비처럼 회전하거나 어둠 속에서 야광을 뿜어내지. 나는 그것을 계속 지켜봐. 보고 또 봐. 처음엔 투명하게 보이던 것들이, 반투명에서 하얗게 변하더니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버렸어. ,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맞아?”


 침묵으로 대응하는 시간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주변의 시간을 훑는다. 걷기 시작한다. 땅에 떨어진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들, 보도블럭 사이 자라난 들풀, 전봇대를 감싸고 있는 덩쿨, 이상하게 적재된 쓰레기와 대충 만든 간판을 본다. 적당히 보고 스친다. 변두리의 널부러진 풍경엔 유행 지난 노래가 24시간 흘러 나왔다. 어느새 내 귀에 찰싹 붙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귀머거리가 되어버렸다. 더이, , 이상, 들을 수, , 수가 어, 없어, . 나는 간신히 그에게 내 상태를 알렸다.


너에게 어느새 눈이 생겼지. 구멍이야. 눈이지만 뻥 뚫려있지. 눈구멍 뒤로 하얗게 굳은 덩어리가 보여. 네가 보는 세상은 움직이고 있는데 정지되었고. 시간이 가는데 언제인지 알 수 없지. 이게 말이 돼? 너는 말을 하기 시작해.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 모습으로. 추억으로 돌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 맞지? 이런 느낌이지? 맞아?”


 우리는 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숨표과 쉼표만 남은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말 할 수록 구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따뜻한 말투에 빨려들었다가 금새 빠져나왔다. 부드러운 그의 눈길을 피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는 가늘고 긴 실루엣이 되었고, 풍경은 싸구려 폭죽같은 섬광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다. 더이상 그에게 나를 알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조용한 소음이 되었다.   

*가수 김현정의 가사 인용

3/23/2018

[리뷰] 2018 쉐어 프로젝트: 실험실

담담한 리뷰’ 2018 쉐어 프로젝트: 실험실 1

쉐어 프로젝트는 창작자가 서교예술실험센터의 공간을 말 그대로 쉐어하며 자신의 작업을 요모조모 부담 없이 실험해볼 수 있는 사업이다. 이 기간에 창작자는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마음껏 실행하거나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꼭 해보고 싶었던 시도를 반복하여 더 나은 결과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관객으로부터 작업 과정 자체에 관한 피드백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

하소정, <1/4평의 시간>
나는 세 번 정도 공간을 방문하여 이들의 시간을 지켜보았고 첫날은 가볍게 휘휘 둘러보았다. 이날 하소정 작가는 투명한 유리로 사방이 오픈된 아트 인포 공간 안에서 나무 조각을 깎고 있었다. 하루에 6시간씩 근 열흘 동안 매일 이곳에서 나무를 깎아 숟가락을 만들고, 남은 톱밥은 관을 상징하는 상자에 채우는 실험이다. 나무의 잔재를 관에 적재하는 반복행위는 죽음을 관조하면서도 대응하는 작가의 태도와 맞닿아있다. 다시 그를 찾아갔을 땐 네다섯 개의 태가 고운 나무 숟가락이 바닥에 놓여 있고, 관에도 톱밥이 두툼하게 채워져 있었다. 12시간을 쉼 없이 깎으면 한 개의 숟가락이 완성된다고 한다. 관객과의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물었다. 작가는 나무 깎는 요령이 생겼는지 손을 쉬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한 남자가 거칠게 던진 질문이 계속 맴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숟가락을 팔기도 하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시비조로 묻다가 마지막에 당신이 작가임을 어떻게 증명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무를 깎는 노동이 관객에 의하여 예술적 행위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발화가 선명해져야 할 순간이 아니었을까 가늠해본다.

신지언, <무위(無爲)를 위하여>
신지언 작가의 <무위(無爲)를 위하여>는 그가 쓴 단편 소설을 인쇄하여 벽에 붙이고 이를 읽은 관객이 자유롭게 밑줄을 긋거나 표시를 남길 수 있는 실험으로, 이러한 개입은 작가의 사전 계획에 따르면 작가의 생각이 담긴 글을 분절하면서 동시에 강조하는 표현이자 작업의 마무리이다. 펜을 들고 시간을 들여 글을 읽었다. 같은 구절에 여러 겹의 밑줄이 쳐 있기도 하고, 물결 모양의 선, 거친 느낌의 직선, 동그라미 등 다양한 표식이 문장 위에 흩뿌려져 있다. 나도 마음에 와닿는 문장에 별을 그렸다. ‘아무것도 아님 혹은 없음을 삶과 예술의 의미로서 사유하는 그의 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위 세계를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주인공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과 답 사이의 시공간이 글을 읽는 각자의 마음속 풍경으로 대치되어, 나도 모르게 지금 내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게 된다. 내 발이 딛고 있는 이곳이 글 속 표현처럼 실존의 도마같이 느껴졌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어떤 껍데기를 버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관객은 어느새 실험의 일부가 된다.

오서연, <뛰는 여자>
오서연 작가의 <뛰는 여자> 프로젝트를 보러 간 첫날, 센터 지하 공간은 다소 비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37일 수요일.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록이 단출하게 붙어 있고 또 다른 벽에는 지난 퍼포먼스 영상이 재생 중이었다. 작가는 이곳을 개인 작업실이자, 관객이 참여하는 워크숍 룸, 아카이브 룸으로 활용하였다. <뛰는 여자>는 외모 강박에 갇힌 여성의 고충을 인터뷰, 연극, 퍼포먼스, 그림 등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로서 즉흥성과 게릴라성, 관객 참여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다음 퍼포먼스 일정을 체크했고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센터 밖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매일 뛰어야 하는 한 여자의 고통스러운 몸짓이 외모에 대한 지적과 시선으로부터 힘껏 탈주하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바뀔 때, 나도 모르게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의 뜀박질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사회 구조의 억압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응원의 기록이 될 것이다.

쉐어 프로젝트가 열리는 시기의 센터는 조금만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작업하다 남은 흔적, 기록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작가의 작업 과정이 자연스럽게 완성을 예고한다. 하소정 작가는 이번 실험을 다음 작업의 요긴한 데이터베이스로 사용할 예정이며, 신지언 작가는 관객이 밑줄 친 자신의 문장을 더듬으며 더욱 깊은 무위를 찾아갈 것이다. 실제로 <뛰는 여자>의 내러티브는 실험을 거듭할수록 확연히 풍성해졌다. 이들의 다음 실험이 그리고 어디에선가 만날 완성작이 많이 궁금해진다.

text by 봄로야 
 

2/05/2018

[메모] 20180209 실험의 동기

다듬지 않은 메모_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의 선을 따라 자신을 밀고 당기고 있다. 그 운동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영상의 편집 과정은 사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질책한 결과다. 어떤 기억이 지금의 나를 통과해서 만지기 두려운 미래와 바로 맞닿아 버리는 상태. 잊고 싶은 감각이다. 불투명한 죽음과 트라우마의 전면을 우린 늘 모르는 척해야 하고, 또 아는 척해야 한다. 무너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이런 종류의 나약함, 실험의 동기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실험이 실패해서 다행이라고 말 해주고 싶다. 결과를 몰라도 괜찮은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측정 불가능한 우리의 상태를 '희연'하게 바라봐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희연한 잠'에서 '희연하다'는 작가가 만들어낸 시적 표현이다. '희고 의연하며 희뿌옇다' 는 뜻을 지닌다. 신이피 개인전, <희연한 잠> 송은아트큐브  

1/31/2018

[메모] 20180112 동물처럼 구를 때

다듬지 않은 메모_김지연 작가는 '관찰자로서의 작가적 태도가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으로 미들 보이스(middle voice, 중간태(中間態))에 관한 개념을 언급하였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미들 보이스는 능동태와 수동태가 가진 이분법적 행위가 아닌 반사, 역 그리고 자동적인 개념으로서의 성질을 의미한다. 각각 내가 나를 죽인다든지(행위가 반사되어 돌아오는), 키스를 한다든지(행위를 교환하는), 썩는, 나타나는, 사라지는 (행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등의 동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5분, 20분, 10분 분량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작가는 이 사운드를 기록했던 자신의 작가적 태도를 '듣는 행위'로 연결지어 말을 이어갔다. '듣는 주체'인 작가는 비를 '맞으며' 비를 녹음할 때,  워터 탱크 '밖에 서서' 탱크의 안 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녹음할 때, 낙하하는 물방울 '주위의' 온갖 노이즈를 함께 녹음할 때 스스로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메모해두었고 우리는 그녀의 기록을 함께 낭독하였다. 최근 세바스치앙 살가두와 동료들이 바다코끼리를 찍으려고 빙판 위를 천천히 구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몸짓은 인간이 아닌 무엇에 다가가기까지의 거리를 횡단하는 방법이었고, 나는 김지연 작가가 물방울에 접근하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듣는 주체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세 번 째 물방울 소리가 좋았다. 정확히는 물방울의 뒤(인간이 아닌)에서 개가 짖는(개가 나타난) 소리가 좋았다. 

*노 연, 캔 위 토크 어바웃 MAVO?(전시)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혹은 Z白호와 버터플라이 사이의 코스들(어셈블리) 중 12일 20:00~22:00에 진행된 김지연, 이강일의 토크식 컨트리뷰션을 관람하였다. 


text by 봄로야 


[서문] 불편한 고리들: 폭력의 예감


불편한 고리들: 폭력의 예감
2016.6.22-6.30
봄로야, 윤나리, 자청, Q9, 혜원 
스페이스 ALTEREGO

일러스트레이터, 미술작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인 5명의 작가가 준비한 이번 전시 ≪불편한 고리들: 폭력의 예감≫은 이들의 활동명인 ‘노뉴워크(NO NEW WORK)’의 공식적인 첫 번째 프로젝트이다. ‘시각이미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모임’을 활동 기제로 정하기에 앞서 이 프로젝트가 생기게 된 계기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둘러싼 각자의 시선을 솔직하게 교환하면서 시작되었다.

여성 폭력의 현장은 그 어떤 사건도 획일적으로 설명되거나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윤나리 작가는 2015년 3월부터 약 1년 동안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 성폭력, 강간, 살인, 추행, 사기, 협박 등의 기사를 모아 피해자의 감정을 일일이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피해자가 겪었을 외상과 내상에 오롯이 집중하여 검정과 파란색으로만 그려진 80여 장의 이미지들은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는 미디어의 왜곡에 맞선다. 

비슷한 결로 봄로야 작가는 1992년 의붓아버지로부터 12년간 성폭행을 당하고 결국 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의 사건에 집중하였다. 작가는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토대로 사건을 피해자, 언론과 여론, 경찰의 대응 등 다각도의 레이어로 나누어, 각각의 입장에서 파생된 텍스트들을 반복하여 기록한다. 기록의 끝은 피해자의 진술로 엮은 단어를 재배치하여 고통을 상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동시에 1997년에 제정된 가정폭력 방지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프린트를 배치하여 폭력이 발생한 가정이 제도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기록화되지 않은 사적 경험을 보임으로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 속 폭력을 드러내고자 한 자청 작가는 어린 시절에 겪은 기억을 퀄트 작업으로 표현하였다. 퀄트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전업주부일 때 찾았던 해방구이자 억압”의 표상이다. 페미니즘 미술 작가들이 강요된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한 퀄트를 작업 기법으로 응용하여 그 의미를 전복시켰듯,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응시하며 일상 속 폭력에 따른 무감과 피로를 해소한다.

Q9와 혜원 작가는 각각 ‘속담’과 ‘포르노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성적 욕망에 따른 폭력을 다루었다. 속담은 예로부터 여성이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언어체계이다. 여성에 관한 편견이 담긴 15,000여 개의 속담을 수집한 <세계여성속담사전>(미네케 스히퍼 저)에서 영감을 받은 Q9 작가의 작업은 남성중심사회의 이분법적 잣대로 폄하된 여성성을 초현실적인 모험으로 재구성하여 그래픽 노블로 제작하였다. 혜원 작가는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비판하는 방법으로서 ‘현대미술에서 재해석되는 포르노 이미지’를 고찰한다. 작가는 상품화된 여성을 신체 이미지를 비판하는 기존 작품들의 주제 의식은 분명 인정하나, 작품 속 해당 여성 주체의 성적 욕망은 표백되고 자본주의와 남성중심사회의 권력 구조로 인해 희생당한 피해자로만 고정되어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는 주제와 그 목적이 선할지라도 보는 이로 인해 성적 대상화된 인물의 주체성이 다시 타자화되는 수많은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오늘도 우리는 여성들이 신체적, 언어적인 폭력 앞에서 불합리함을 겪거나 심각하게는 목숨을 잃는 상황을 보고, 듣고, 경험한다. 노뉴워크는 이번 전시를 통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할 수 있는 폭력의 민낯들을 이미지로 기록하고 드러내며 전복하는 작가적 태도를 공유하고자 한다.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될 ‘폭력의 예감’을 함께 감각하고 그 불편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실천 지표를 찾는 과정이다.

text by 봄로야

[리뷰] 떠도는 불안-<오후 네 시의 생활력>


떠도는 불안
-<오후 네 시의 생활력> Review

말과활 12월호 기고


1. 근종의 자궁 없음

“이 판도 스트레스 작렬이야.” 이주노동자를 돕는 활동가의 말이다. 나는 왜 활동가는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적어도 나보다는 사회가 만든 선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어이없는 상대적 박탈감에 화가 난다. 더 이상 꿈이 될 수 없는 내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만 남아 서로의 눈을 가린다. 나는 사회에서 ‘이 선생’으로 불린다.
남의 일에 상관 말고 내 일에만 성실하라던 엄마의 가르침이 나의 입을 통해 학생들에게 옮겨 간다. "생각하지 마. 머리를 멈춰." 내 말은 학교 안에서 매일 유효한 지침이 되었다. 나 또한 생각을 멈추고 교감을 따라 교회를 나가며, 봉사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안에서 생긴 분노가 원인을 감춘 채 거리의 누군가에게 전이된다. 이게 이 선생의 판이다.
의사 선생이 ‘이 선생’의 자궁을 파내야 한단다. 자궁에 작고 큰 근종들이 생겼다고 한다. 의사는 출산을 거들먹거리며 적출을 권유했다. 실비 보험이라도 가입해서 다행이지, 아무것도 없는 애인 묵호가 문득 걱정된다. 묵호는 ‘활동가’이다. 묵호의 주변은 분노의 원인을 촛불로 비춘다. 활동가는 근종은 자궁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근종의 근본 원인이 내가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말해 준다. 분노에 이름이 생긴다. 나는 들어내지 않기로, 버리지 않기로, 그만두지 않기로 한다.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내가 되고 싶지 않고, 정치가 달라졌으면 해요.” 그렇게 내 자궁이 할 역할의 두께는 한 겹 얇아졌다.

2. 미혼과 마흔의 ㅣ와 ㅏ

오늘을 24시간으로, 한 시간으로, 일분으로 잘게 쪼개 본다. 상하기 직전의 묵은지를 버리지 않고 고등어 묵은지 찜으로 만들어 묵호를 초대해 함께 먹었다. 친구가 여행 가는 동안 아이를 낳지 못 하는 고양이 두 마리를 돌봐 주었다. 방학에는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돌봐 주기로 했다.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의 방학은 내가 서른 살에서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매번 계약 연장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다른 학교로 이주되기 전의 불안한 유예 기간.
내일은 알 수 없는 빈 구멍이다. 구멍으로 먹으면 안 될 음식들이 흘러 들어온다. 이주노동자들의 핸드폰에 슬픈 미소들이 찍힌다. 노량진 독서실에서 유령처럼 공부하는 고시생의 찐내로 채워진다. 텅 빈 첫 지하철에는 노인들과 청소부가 탄다. 고 3 담임을 맡았을 때 자퇴한 수현이의 빈자리에 다른 학생이 앉는다. 묵호가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마음이 텅 빈다. 묵호는 내일이 두렵지 않을까? 묵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미혼이 아닌 나의 내일은 어떨까.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 임금에 수업 하나 더 보태기에 자리를 거절했다. 고양이와 친구가 듣더니 큭큭 웃는다. 어중간한 방학은 끝났다. 틈틈이 부모가 예상하지 못한 이런 나의 숱한 오늘을 수긍하도록, 미리 그들 곁에 내 자리도 만들었다. 두 팔꿈치와 두 다리로 플랭크! 버텨왔더니 버틸 줄 알고, 참았더니 참을 줄 알게 된, 그래서 참지 않고 얻은 오늘의 얄궂은 자리이다. 농부가 삼백 원 받고 이주노동자들이 힘들게 키운 상추를 빈 입속에 밀어 넣는다. 부모님이 직접 키워 만든 오달진 수세미로 묵호가 설거지를 했다. 적당히 깨끗하게 잘 닦인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창문 밖에 서면 건물 안이 보이고, 창문 안에 서면 건물 밖이 보인다. 구멍 같은 창문은 안, 밖을 연결해주고 새로운 공기로 채워 넣는 중요한 자리이다. 활동가는 나를 세상과 별도로 두지 말라고 했다.

3. 은근 티 나는 소리

고용허가제 폐지를 위한 서명지를 나눠주는 묵호를 보고 있자니, 주보를 나눠 주는 내가 창피하다. 그들 안에 묵호가 있고, 임용고시 학원 안에도 묵호가 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들은 오후 네 시를 넘어 노을을 뚫고 밤과 새벽이 만든 짙은 구멍에 감자탕과 소주를 붓는다. 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티를 낸다. 유보했던 내 삶의 문제들이 현수막과 피켓에 적혀 있다. 사월부터 겨울까지, 오후 네시 나의 퇴근길은 그래서 괴로웠다. 
막노동으로 나를 키운 부모에게 쌓인 죄책감을 비 오는 날 함께 잡초를 뽑으며 은근하게 녹여 낸다. 부모는 은근 기쁜 티를 낸다. 학교를 떠난 수현에게 미더운 말 못 해준 자신을 자책하며, 수현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에 은근 자주 가서 치킨을 시켜 먹는다. 함께 살기 위해 중성화 수술을 시킨 고양이 율이와 파니에게 친구는 은근히 미안함을 느낀다. 동생은 나를 야라고 불렀다. 여동생의 눈에 나는 비혼에 출산을 거부하며 가족과 거리두기가 은근 티 나는 사람으로 비치겠지. 조카를 자주 돌봐준다. 여동생이 어느새 나를 언니라 부른다.
은근 티 나는 소리들이 소란스럽다. 전경들이 바글바글, 시위대도 바글바글, 부침이 지글지글, 묵은지가 보글보글, 경운기가 탈탈탈, 고물 컴퓨터가 털털털, 지하철이 덜컹덜컹, 기차가 철컹철컹, 헤어 드라이기 윙윙, 교실 안 히터 소리 윙윙, 이주노동자의 남자 숙소 안 선풍기 윙윙, 그들의 핸드폰이 찰칵 찰칵, 반 까페에 올리기 위해 선생이 핸드폰으로 지하철을 찰칵 찰칵, 아버지가 수세미를 쁘드득 쁘드득, 이주노동자가 상추를 쁘드득 쁘드득, 병실에서 습하, 습하, 바다에서 습하, 습하. 소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답을 알려주지 않는 세상의 거대한 침묵이었다. 되새겨야 할 반성과 자부심의 소리가 엄마의 니기미, 아버지의 니기미, 청소부 아주머니의 니기미 씨발에 섞여 은근 티 내며 세상을 채운다. 무엇으로 삶이 되었던가.

4. 개구리헤엄력

나머지 근종을 성실하게 떼어냈다. 근종 때문에 자궁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모난 돌들 때문에 세상의 질감을 알게 되었다. 밀려난 게 아니라 스스로 링 밖으로 나왔다. 링 안쪽으로 떠도는 불안 덩어리들이 보인다. 두 팔과 다리를 개구리처럼 접었다, 폈다 반복해서 다시 링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개의 구멍들도 함께 보인다. 구멍으로 들어가 본다. 구멍의 바닥을 발끝으로 살살 만져 본다. 머리는 구멍 밖으로 내밀어 눈으로 구멍의 주변을 확인한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구멍을 빠져나온다. 다시 링 밖으로 나간다. 링의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한다. 링이 구멍이고 구멍이 나고 내가 링이었나 싶다. 링 안쪽으로 떠도는 불안 덩어리들이 보인다.
플랭크 자세도 잘 하지만, 개구리헤엄도 이제 잘 한다. 묵호와 함께 개구리헤엄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싶다. 습하, 습하 하고 심호흡도 잘 한다. 호흡력을 기를 수 있는 구멍도 하나 더 만들고 싶다. 숨 한 번 잘 쉬었다. 잘 쉬어서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의 심호흡이 꿈이 된다.

* 1인칭 시점으로 써 보았다. 실은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 이 만화책의 주요 등장인물인 ‘이 선생’의 이름은 50페이지에 처음 나온다. “우린 뭐 달라? 뭐야, 영진씨. 우린 사람 아냐?” 영진의 이름을 말한 이 활동가는 136페이지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촛불을 권한다. 142페이지에서는 묵호가 “이영진! 함부로 일반화 하지마.”라 말했고, 88페이지에서는 친구가 “영진아, 우리 아직 괜찮은 거야?” 라고 물었다.
* 이 만화책은 대략 19번 정도 ‘괜찮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97페이지에는 만화칸 위에 수세미 줄기가 겹쳐 그려져 있다. 편집 오류이든 의도이든 선이 있되 선을 넘고 선을 이어주는 예쁜 풍경으로 읽혔다.
* 이 만화책은 뒤에서 앞으로 읽고 라면 한 그릇 먹어도 얼핏 좋을 것 같다.

text & illustration by 봄로야

[서문] Les Flâneurs : 산책자들

Les Flâneurs : 산책자들
2013.01.24-2013.03.02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 
갤러리 스케이프 

"완벽한 산책자에게 있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물결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한가운데 거처를 마련한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다. ...집 밖에 있으면서도 모든 곳에서 자기 집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세계를 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 있는 것. ...관찰자는 모든 곳에서 익명성을 즐기는 군주이다." (보들레르,『낭만파 예술』, 파리, p.64-65「현대적 삶의 화가」) 

한 플라뇌르(Flâneur)가 거리 속 사람들 틈을 휘휘 저어 한가롭게 빠져나간다. 초점 없는 망연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광경을 관찰한다. 머릿속 관념들이 풍경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장식과 묘사는 사라지고 암시로 가득 찬 풍경만 남는다. 어느새 그는 풍경의 표면 그 안쪽을 걷기 시작한다. 산책자란 뜻을 가진 '플라뇌르'는 보들레르가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일어나는 근대화 현상을 지켜보는 자들을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세 명의 산책자,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의 작품은 현 시대의 풍경을 관찰하며 포착한 관념들을 은유적인 시각언어로 풀어놓고 있다.

첫 번째 산책자: 낯섦을 수반한 익숙한 풍경 
임소담은 여행하면서 찍은 스냅 사진, 산책하며 발견한 일상 이미지,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들을 수집한다. 수집된 풍경 이미지들은 심리적으로 연상되는 다른 풍경으로 즉흥적으로 대체되거나, 오래부터 그의 기억 속에 체화 된 장면들과 조우하며 새로운 장소성(placeness)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작품「Mother」에 보이는 텅 빈 주차장에 혼자 앉아 있는 길고양이는 작가의 무의식 저 너머에 숨어있던 표상된 존재일 수 있다.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작품 제목 또한 그림 속 풍경을 단순한 다큐멘터리적 기록이 아닌 모호한 단상이 스며든 장면으로 읽혀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보편적이고 익숙한 소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기억 속 풍경들을 쉽게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임소담이 그려낸 풍경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나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장소가 된다.

두 번째 산책자: 낙체(Falling Body)들로 가득 찬 풍경
주변의 인물, 동물 및 사건들이 재조합 된 유창창의 작품 속 가상 풍경은 모든 비극의 집합체,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다. 그는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디스토피아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성공을 상징하는 뉴욕의 지도 위에 자신의 정액을 흩뿌리고 모든 텍스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지워버린다. 또한 작가가 의도하는 파멸의 욕망을 대변하는'리틀 피플'들이 알록달록한 산야를 넘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독특하게도 작가는 인간을 중력에 얽매여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버린'낙체'들로 간주한다. 중력을 우리의 몸에 포함되어 있는 불가항력적 감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이 짊어진 생의 무게감으로 치환한 결과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천상(유토피아)에서 떨어져 이미 천하(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피조물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낙체들로 가득 찬 불안과 우울로 침잠된 디스토피아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산책자: 무와 유가 공생하는 개념화 된 풍경

식물과 각목, 비닐, 나뭇가지들로 엮어 만든 이해민선의「직립 식물」연작은 도시 속 나무와 식물들이 죽지 않게 지탱해주는 각목 지지대에서 비롯된 성찰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한때는 나무였던 것이 다른 나무를 지지하고 있는' 이 형상은 흡사 동물과 같이 느릿느릿 걸어 다닐 것만 같다. 그는 황폐화되거나 퇴색된 도시 속 대지에 흡사 동물의 형상 같은 이 직립 식물들을 '살아있게 보이도록' 두는데, 이들로 인해 문명과 인간에 의해 사회적 측면에선 죽은 대지는 쓸모와 생기를 얻는다.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이 서로 도우며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애처롭다. 작가의 성찰로 탄생된 '개념화 된 풍경'에 나타나는 이러한 패러독스는 생명체의 존속과 공존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인간이 생명을 대하는 이항대립적 태도에 질문을 던진다. 보들레르의 표현대로 많은 예술가들은 현대의 '어떤 생활'을 유유히 활보하며 탐구하는 익명의 산책자들이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면 사라져버리기 쉬운 풍경의 단편을 '또 다른 세계'로 확장시키는 면밀한 관찰자이다. 이번 전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자신의 주관적인 사유체계에 녹여내는 세 명의 산책자들이 가진 작가적 태도와 미적 감수성에 주목해보았다. 작가가 만들어 낸 정서적 공간을 좇아가다 보면, 일상적인 풍경이 나만의 심적 풍경(Psychological Scenery)과 부딪히며 생성되는 다양한 찰나들을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text by 봄로야

[서문] 사유지

사유지 The Private Land
2012.07.20-2012.08.19
에테르, 이지은, 정혜정, 마사하루 사토
갤러리 스케이프 

일상을 사유(思惟)하는 사유지(私有地) ●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박스나 이불 따위로 나만의 집을 지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장롱에 들어가기도 하고 비닐을 머리에 쓴 채 잠들기도 한다. 이는 유아기에서 그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에 가깝다. 그 어떤 방어기제 없이 완벽한 안락감을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사실상 태어난 순간부터 외부와 타인에게 노출되며 좌절된다. 작가 에테르, 이지은, 정혜정, 마사하루 사토(Masaharu Sato)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영역을 '자기만의 방'과 '그 외 세계'로 집요하게 분리시켜 그러한 욕망을 지속시켜나간다. 사적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욕구가 인간의 본능이지만 영역이 구축되는 형식이나 명분, 그 본질 및 내막의 성격은 창작자로서 모두 다르다.

에테르의「오류로의 기대감(Anticipation of an Error)」연작은 13세기의 서양 문학을 대표하는 단테가 사후 세계를 상징적으로 다룬 『신곡(La Divina Comedia)』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서른다섯 살 단테가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면, 단테와 같은 나이인 작가는 작은 방 안에 누워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망상의 사유를 시작한다. 시야에 보이는 칫솔, 면도기, 운동화 같은 사물들이 의인화되고 바닥, 옷장, 창문은 중세 시대 양식으로 변한다. 벽은 리투아니아어와 라틴어로 쓰인 해독 불가한 시각적 텍스트와 자신의 상으로 겹겹이 메워진다. 그림이 주는 시각 표현들은 앙리 르페브르가 그의 저서『현대 세계의 일상성(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에서 '일상성을 사물의 정돈, 분류, 결합에 따라 인격화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하는 지점'과 맞물린다. 반면 그 이면은 단테가 지옥과 연옥에서 겪은 일련의 감정들과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화려한 색감과 캐릭터가 풍기는 귀여움, 어른이 미처 되지 못한 소년의 미묘한 눈빛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이중적인 태도를 표출해내는 시작점이자 유일한 공간이 그의 작업실이자 집이 된다.

이지은은 주변에서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장난감을 혼성, 변종, 결합, 해체시켜 하이브리드 장난감 군대를 만든다. 이 군대의 최종 목표는 지구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지휘와 통제 하에 움직이는 이 부하들이 정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속에서 활동하는 히틀러를 닮은 다이버틀러, 빗으로 정전기를 일으켜 만들어진 에너지로 머리를 가격할 수 있는 주걱, 엉덩이에서 팝콘을 쏟아내는 토끼 등이 다소 엉뚱하고 귀엽게만 보인다. 작가는 장난감의 이러한 특성을 작전으로 삼아 강박적으로 반복 드로잉하여 이들의 기능을 전략적으로 노출시킨다. 벽 틈, 의자 밑, 테이블 모서리와 같은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이들을 손가락으로 집어 무심코 주머니에 넣는 순간 인간을 향한 공격은 시작된다. 세계가 사라질 때 자신 역시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시선은 잔뜩 날이 서있다. 동시에 작고 만만해 보이는 존재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천진난만하고 여린 동심이 느껴진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어떤 정복을 꿈꾼다.

보석갈귀어, 턱장어, 눈깔주머니, 이두꿀꿀 멍게라는 이름을 가진 괴이한 생명체들이 사는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소녀. 소녀는 한 명이지만 여러 명이 되어 구석구석 궁금한 곳 어디든 볼 수 있는 분신술을 겸비하고 있다. 작가 정혜정은 그 소녀이자 바다 세계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스쿠버 다이빙을 8년간 지속한 실제 경험은 물의 깊고 어두우며 고요한 성질을 응축해내고, 그 속에 사는 다양한 바다 생물들은 초현실적인 심리와 만나 인체와 결합하여 모호한 성별을 띤 존재들로 재 가공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눈알해파리와 함께하는 촉촉한 여행」과「섬」외에 인도, 모로코에서 모은 수집물로 만든「WWW(World Wide Wander)」프로젝트, 그리고 제네바를 다녀온 후 현재 진행 중인「Rainbow 7 brothers」작업에서도 보이듯, 작가는 낯선 장소의 공간을 자신만의 장소성(Placeness)으로 실재화시킨다. 대부분의 작업들은 마치 자신이 이 세계를 발견한 매개자인 척 카메라의 시선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구사된다. 혹은 가상의 인물이 그 세계를 관찰, 기록하거나 실재 인물들과 혼재돼 있다. 이는 환상을 실재로 만들기 위한 방법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실재가 경험 없는 '단순한' 상상에 잠식당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객관적인 의지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작가 마사하루 사토의 애니메이션「Calling」은 세밀하게 묘사 된12개의 장소, 그리고 그 장소에 놓인 12개의 전화기가 끊임없이 전화벨을 울리며 전후 구분 없이 루핑되는 작업이다. 얼핏 우리의 일상생활과 별 다를 바 없는 장소로 보이지만 전화를 받는 이가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 의자, 침대, 도로, 공원임을 곧 알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풍경들을 "빈 세계"라고 표현하는 데, 여기서 전화기는 이러한 빈 세계를 상징하는 매질이 된다. 스쳐가는 풍경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실재 너머의 극실재(Hyper-Reality)를 구현하는 그의 작업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개념화한 시뮬라크르적 환상을 연상시킨다. 비현실적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 원래의 현실이 소멸되어버리고 실재라고 믿었던 일상과 일상적 오브제들은 텅 빈 상태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Calling」에서 전화기가 그 세계를 상징하는 오브제라면 디지털 페인팅「Daylight」에서는 풀숲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Reading」에서는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 노트가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에 모인 네 작가는 공통적으로 동시대적이며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이들의 관조적 태도는 히키코모리나 아웃사이더, 염세주의자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상 거리두기를 위해 쌓은 벽은 자신의 내적 욕구를 투영할 수 있는 바깥이 비춰지는 영화 스크린과 같다. 반투명의 거대한 스크린 위에 자신들이 구조화한 일상을 오버랩 하여 타인들에게 보이게 하고픈 욕망은 유아기적 쾌락과 유희를 동반한 소년, 소녀의 에고에 가깝다. 이러한 은밀한 놀이 행위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어린 아이 같은 고집으로 시대를 사유하고자 하는 작가적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도 작용된다. 다시 말해 주류 사회, 주류 미술에서 요구하는 시스템에 발맞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립 근거를 마련하고 '사회적 죽음'에 쉽게 희생되지 않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미스터리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유지에 초대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이들을 보호하고 응원하게 된다. 자칫 잘못 손대면 박스로 만든 집이 부숴질까 걱정하며, 이불 속 공간이 헝클어질까 두려워하며 살금살금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그들이 치밀하게 조적(朝敵)해 만든 또 하나의 세계,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자 벽돌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내는 작업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text by 봄로야 

[서문] 태양의 반대편을 쫓는 남자

태양의 반대편을 쫓는 남자
-작가 김형에 관한 에세이
2012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제6기 입주작가 공동워크숍 기고글

카메라를 들고 태양의 반대편을 쫓는 남자가 있다. 그는 어둠 한 복판에 카메라에 담을 특정 인물을 감춰둔다. 명도차가 사라져 평평해진 풍경에 놓인 인물은 오로지 작가가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섬광에서만 그 형상을 드러낸다. 동시에 인물이 들고 있는 거울은 섬광을 반사해내며 번쩍인다. 인물들이 취하는 제스처는 대부분 경직되고 무표정하다. 그로 인해 형성되는 긴장감은 나머지의 어두운 공간까지도 더욱 낯설고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낮이 찾아오지 않는 밤이고 그늘이며 서늘함이다.  

김 형 작가는 경험에서 비롯된 지극히 개인적인 고독감을 주변 인물에 투영시켜 재맥락화 해왔다. 최근 그는 <심리적 관계>(2011)와 <가족사진>(2012) 연작에서, 전작이 가진 기존의 주제는 고수하되 암흑 속 인물을 포착하는 촬영 방식으로 그 프레이밍을 달리한다. <심리적 관계>는 작가가 독일의 쾰른에 머무르며 만난 사람들로,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고립감이 극대화될 무렵 최초로 소통하게 된 이들이다. 알고 보니 그들 역시 폴란드에서 건너온 이방인들이었다. 작가는 온기 없는 어둠을 뚫고 우두커니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에게서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거울을 이용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들은 거울을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비추어 섬광을 반사시키거나, 자기 얼굴의 여러 측면을 보이게 비춘다. 그런데 이 연출 구도는 자신을 비추곤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다. 전자는 섬광으로 인해 카메라를 든 작가 자신이 거울에 비춰지지 않고, 후자는 그들의 시선을 카메라에 고정시켜버림으로서 거울 속 자신을 볼 수 없게 된다. 보이지 않는 거울이라는 모순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는 작가와 그들의 자아를 상실케 하고 마치 실체 없는 유령처럼 보이게 만든다. 결국 작가와 그들 사이에 성립된 어떤 ‘심리적 관계’는 유추할 수 없이 멜랑콜리아의 서늘함으로 한없이 침잠한다. 

부모님을 촬영한 <가족사진> 역시 불안과 슬픔을 가득 내포하고 있다. 텁텁한 무늬가 베어 나오는 오래된 자개농 앞에서 눈을 가린 채 거울을 들고 있거나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아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아버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투명한 아크릴판을 들고 있는 어머니의 상은 오롯이 작가-아들의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다. 흑백사진이 주는 균일한 건조함은 죽은 자의 초상을 상기시킨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나를 감싸는 불안감과 죽음의 느낌은 항상 가족 간의 조용한 침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가슴속의 말들을 끝내 털어놓지 못하고 낯선 산속에서 가족의 물품들을 데려다 기록을 하며 애도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라고 말한다. 

아직 살아있는 가족을 애도하려는 이러한 역설적 행위는 <심리적 관계>에서 묻어나는 멜랑콜리아에 비해 다소 자기 내부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시 말해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공포 자체를 표현하기보다는 그 부재를 극복하려는 감정적 표출이다. 유일하게 인물이 없는 마른 고목 앞에 놓인 녹슨 철제 침대는 상실을 마주하려 애쓰는 작가적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또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피사체의 희미한 미소, 만개한 흰 꽃, 터지고 있는 폭죽과 같은 요소들은 어둠과 상징적으로 대치되며 미미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지금껏 작가는 어둠 속 피사체를 은밀하게 응시하며 타자를 향한 욕망을 소극적으로 보여주고, 거울과 같은 사물들을 통해 자신과 타자와의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를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던 그에게 드디어 아침을 예고하는 여명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일까. 

이는 현재 진행 중인 작품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다>(2012)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최초로 그는 이 작업에서 스스로를 자신의 애인과 함께 피사체로서 담아냈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경험이 주는 사진언어는 주변 인물에 전이시켰던 멜랑콜리아가 작가 본연의 것이었음을 직시하게 만든다. 

이토록 작가를 둘러싼 버석거리는 심연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는 어둠을 쫓아 타자를 감추고 드러내는 반복을 거쳐 마침내 자신을 솔직하게 표상하는 과정을 통해, 암흑 속 불안과 우울감에 점차 익숙해진 듯하다. 어둠에서 시작하여 어둠으로 끝난다. 가끔 가느다란 빛줄기가 단발성으로 그와 그의 주변을 비춘다. 언제 섬광이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찰나를 집요하게 부여잡는다. 그렇게 작가는 태양의 반대편으로 완전히 잠식하기로 선택한다.

text by 봄로야